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방데 전쟁 (문단 편집) == 기타 == 이 사례는 단순히 [[프랑스]]만의 사례가 아니라 19세기 근대적 [[국민국가]]의 성장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였던 '국민 만들기'의 과정을 보여준다. [[국민국가]]가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공동체로 부각되면 이와 상충하는 다양한 사회집단들은 망각되도록 강제되는데 방데 전쟁은 그것이 극단적으로 터져나온 예인 것이다. 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사례로, 조선에서는 농민봉기가 벌어져 그들을 진압하고 나면 이른바 '장두(狀頭)'라고 불리는 주동자들만 처형하고 나머지는 적당히 봐주는 게 관례였다.[* "어쨌든 다 주상의 백성이 아닌가? 몇몇 사람들의 선동에 넘어간 것뿐이지 저들 모두가 진심은 아니다" 라는 관념도 있었고 국왕 스스로가 민란 앞에서는 "백성들이 저런 몇몇 사람들의 선동에 넘어간 것도 따지고 보면 국왕인 내가 정치를 제대로 못했기 때문이다. '''모든 책임은 국왕인 나에게 있다.'''"며 어느 정도 백성들을 향해 겉으로라도 숙이는 게 미덕으로 여겨졌다. 물론 민중 봉기가 일어난 지역을 강등시키고 그 지역 주민들의 혜택을 빼앗는 '뒤끝'은 부렸지만...][* [[동학농민혁명]]의 주동자들조차도 마치 프랑스 대혁명 초기 방데 주민들이 혁명의 대의인 '자유 평등 박애'에 공감하고 적극 찬성하는 입장이었던 것처럼 조선 왕조라는 체제 자체를, 그리고 고종이라는 군주의 통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무장 포고문에서부터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hm/view.do?levelId=hm_117_0020|우리는 주상 전하께 충성하는 백성인데, 탐학한 관리들이 우리 훌륭하신 주상 전하의 눈을 흐리며 주상을 팔아 백성을 괴롭히므로 참다 못해 저 탐관오리를 조지고 우리 전하의 통치가 바로서는 것을 돕기 위해 무장한 것이다]]'''"라는 입장을 천명하고 나섰기에 어느 정도 '타협의 여지'를 열어 둔 셈이었다. 이러한 동학농민혁명을 직접 가까이서 볼 기회가 있었던 영국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동학농민혁명의 주동자들을 "너무도 확고하고 이성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평하며 "'''반란군이 아니라 무장한 개혁자들'''"이라고 부를 정도다.] 그런데 근대화가 진행된 후에는 '감히 조국에 반기를 들어?' 하면서 대규모 학살을 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빅토르 위고]]의 마지막 장편 소설인 <93년>이 방데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혁명과 전쟁의 물결 속에 묻혀버린 기본적인 인간성과 인권이 진정한 혁명의 본질이었음을 알리는 내용이다. 한편 방데 지방은 이 사건 이후 프랑스 혁명정부, 그리고 이를 무너뜨리고 황제 자리에 오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참고로 나폴레옹은 이 사건에 대해 비판적이었다고 한다.]까지 부정적으로 보았으며 부르봉 왕실에 대한 지지도가 매우 높은 지역이 되었다. 때문에 1815년 나폴레옹이 [[백일천하|엘바 섬에서 탈출해 프랑스의 권력을 잠시 장악했을 때도]] 이 지역은 나폴레옹을 거부하여 나폴레옹은 방데에 진압군을 파견해야 했고[* 이때 마리의 두 번째 남편인 루이 드 라로슈자클랭이 봉기를 주도했고 이때 전투에서 사망했다.] 왕정복고 후인 1830년에 [[7월 혁명]]이 일어나 [[샤를 10세]]가 퇴위하고 [[루이필리프|루이 필리프]]가 왕위에 올랐을 때에도 이 지역은 샤를 10세를 지지하면서 1832년 5월 샤를 10세의 며느리인 베리 공작부인이 주도해 부르봉 왕조를 다시 복구하려는 봉기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앞에서 나폴레옹에 반대해 봉기했던 루이 드 라로슈자클랭과 마리의 둘째 아들인 루이 앙리가 이 봉기에 가담했다. 이 정도면 부자가, 나아가 하나의 가정(부부와 그 아들)이 방데와 연을 맺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루이 앙리는 1833년에 리스본 전투에서 사망했다.] 다만 [[1848년 혁명]] 당시 루이 필리프가 축출된 뒤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나폴레옹 3세]]를 80% 가까운 표로 밀어주었고, 이후로 프랑스의 정국이 변화하며 프랑스 우파의 대세가 공화파로 변하자 그에 맞추어서 뽑는 모습을 보였다. 1958년 5공화국 출범 이후로도 우파 성향이 강한편인데, 동안 같이 동기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위의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방데에 살던 공화파들도 상당한 피해를 보았는데 이들은 처음에는 방데의 농민군한테 죽었고 그 다음에는 공화군한테 죽었다. 양쪽 모두한테 수난을 당한 셈.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00px-Alexandre_Dumas_%281762-1806%29.jpg]] [[알렉상드르 뒤마]]의 아버지인 카리브해 출신 [[흑백혼혈]]인 [[토마알렉상드르 뒤마]]가 이 전쟁에서 공화군 장군으로 활동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노예에서 해방된 신분인 자유 흑인에 대한 공적인 차별대우를 하지는 않았고 당시에는 상황이 급박하다보니 유색인종들도 군인으로 써먹었는데 그 사례 중 하나이다. 당시 프랑스가 인종차별이 없는 나라는 아니었고 사적으로는 흑인이라고 멸시하고 드러나지 않게 차별하는 일이 꽤 있었다. 특히 유색인종을 백인처럼 동등하게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 [[로베스피에르]]와 달리 [[나폴레옹]]은 유색인종을 차별했고 [[아이티]]에서 반란이 일어날 때 흑인들끼리도 자유민과 노예가 복잡하게 서로 이해 관계가 얽혀 심지어 각자의 편을 드는 백인군들과도 국적을 가리지 않고 손을 잡는 모습까지 보이면서 서로 싸우기는 했지만, 나폴레옹이 아이티에서의 반란을 진압을 명령하는 과정에서 흑인이면 전부 학살하라고 명령을 내리고 진짜로 학살을 벌이자 결국 흑인들이 신분에 상관없이 뭉쳐서 프랑스에 저항해서 독립했다.] 방데 전쟁에서 희생당한 양민들을 기리기 위해 시네세니라는 지역에서 지역 주민들이 자원봉사로 참여하여 여는 오페라를 포함한 지역 행사가 있다. 이 행사는 [[프랑스 대통령]]도 관람하였다고 한다. [[http://www.donga.com/docs/magazine/weekly_donga/news243/wd243ff010.html|#]] 처음엔 규모가 작았으나 이후 방데 전쟁을 포함한 지역 역사를 재연하고 공연하는 테마파크 퓌 뒤 퓌로 발전해서 전 세계의 관광객을 모으고 있다. [[http://news.kbs.co.kr/news/view.do?ncd=3161974&dable=10.1.1|[월드 리포트] 숨 막히는 지상 최대 공연 ‘역사 속으로’]] [[분류:프랑스 혁명 전쟁]][[분류:실패한 쿠데타 및 반란]]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